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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가? - 백승덕 (2016.10.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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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가? - 백승덕 (2016.10.26)

만인만색 2017. 9. 7. 02:02





우리는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가?

- ‘전문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사회 곳곳에서 '전문가의 죽음'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두고 '병사'라고 판단한 서울대병원의 사망진단서는 전문가가 죽었음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서 쓰러진 고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서울대병원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인의 주치의였던 백선하 교수는 심폐정지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판단은 의사협회가 가르치고 있는 사망진단서 작성 가이드라인과 배치된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죽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망원인이 심폐정지냐며 사망진단서를 조롱하는 여론이 이어진 것도 자연스러웠다.


비판이 들끓자 서울대병원에서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특조위의 조사결과는 혼란을 전혀 잠재우지 못했다. 이윤성 특조위원장은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자신은 '외인사'라고 썼겠지만 주치의 백선하 교수의 ‘진정성’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괴한 발표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싶지만 백선하 교수 입장에서 할 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19 대원이 백남기 농민을 엠뷸런스에 싣고 왔을 때 그는 단지 '집회에 참석했다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전했을 뿐이었다. 응급실에 근무하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 말을 주치의에게 전했으니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서 쓰러진 장면을 '직접' 본 증인은 아무도 없었던 셈이다. 다른 문제들을 제쳐두고 보자면 백선하 교수는 물대포가 원인이라고 확신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할 수 있을 여지가 있다. 전해지는 말을 자신이 믿을지 말지는 순전히 백선하 교수 자신의 진정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진정성에 대해서 서울대병원 특조위조차도 조사할 방법은 거의 없다.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백선하 교수는 너무도 단호하게 '병사'를 주장했다. 자신은 어떠한 외압을 받은 바가 없으며 단지 전문가로서 진정성에 합당하게 판단을 내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처럼 단호한 표정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는 있다. 그는 ‘합리성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신념형 인간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데올로기의 합리성’을 철저하게 믿는 실리형 인간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는 판단의 오류가능성에 대해서 그처럼 단호히 부정할 까닭이 없다. 애당초 백남기 농민이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생존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했다는 증언이나 병원에서 의료보험 신청을 할 때 11번이나 '외인상 출혈'로 써서 제출했다는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꽤나 높다. 그러나 짐작은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판단할 때는 항상 여지가 존재한다. 예컨대 어느 사람이 카페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가 화장실에 갈 때 옆자리엔 남자손님 한 사람만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그 손님은 자리를 떠났고 카페엔 손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이 지갑을 훔쳐갔을 거란 의심은 충분히 타당하다. 게다가 CCTV를 돌려보니 그 손님이 지갑을 들고 나서는 장면이 녹화되었다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가 범인이다!' 그러나 그 남자손님은 아직도 항변할 여지가 있다. CCTV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자신은 그 지갑 브랜드가 뭔지 궁금해서 들춰봤다가 그 자리에 놓아두고 나왔다거나 지갑 무게가 궁금해서 잠시 들었다가 CCTV 사각지대인 자리에 놓고 나왔다는 식으로 말이다. CCTV가 조작됐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요컨대 그는 원인과 결과 사이를 매개하는 증거가 불확실하다고 주장할 여지를 끝끝내 찾을 수가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만일 경찰이 취조결과 남자손님의 말이 타당하다면서 무혐의 처분을 내린다면 이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내면 문제로 치부될 수가 없다. 지갑을 잃어버린 피해자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 역시 경찰을 불신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화장실을 갈 때 CCTV가 있다고 짐을 두고 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더 이상 제도를 믿지 않는 상황이 바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백선하 교수가 일으킨 파문은 어떤 조건에서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가 유지되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첫째, 전문가 개인의 판단은 동료 전문가 집단에 의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백선하 교수의 주장이 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대중들의 전문지식에 대한 몰이해가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들이 나서서 백선하 교수의 사망진단은 의학계에서도 워낙 이례적인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둘째, 개인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판단이 사회 통념에 크게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천안함 사태나 사드 배치 등 군사전문가들이 내린 판단이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을 빚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논란을 두고 '괴담'이나 '유언비어'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다고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군대나 검찰의 판단은 전문가 집단이 승인한 것임에도 사회적으로 신뢰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점은 의학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백선하 교수의 사망진단서가 크게 논란이 되기 전부터 수사기관의 부검결과가 터무니없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문성이 인정을 받기 위해선 두 단계의 승인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역사학계를 돌아보자. 역사학자들은 '전문가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가? 박근혜 정부가 작년 11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발표한 이후로 국사학계는 국가로부터 전문성을 부정당한 집단이 되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국사학계 90%가 좌파"라고 공언한 것은 전문성을 둘러싼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정부와 여당의 공격은 국정화 정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통해 볼 수 있듯 사회적으로 크게 지지 받지 못했다. 그러한 공격은 전문가 집단의 승인도 받지 못했지만 사회 통념과도 위배됐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 '단 하나의 올바른 역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그러나 역사학계가 확보한 사회적 신뢰 역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점에 나가보면 그러한 현실을 금방 느낄 수 있다. 한국사 관련 베스트셀러 중에 현직 교수나 강사 등 소위 전문가들이 쓴 책은 찾아 볼 수가 없다. TV 같은 대중매체나 SNS에서 떠도는 영상들을 봐도 설민석이나 도올 김용옥처럼 역사학계에 몸을 담지 않은 '비전문가'들의 강연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전문가들의 말과 글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는 전문가들에게 성과가 되는 글은 따로 있다. 대학에 자리를 잡기 전까진 연구재단이 인정한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 편수가 무엇보다 중요한 연구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나마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매년 1~3 편씩 학술논문을 생산해내야 하는 족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학술연구가 대체로 국가지원금에 기대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대중서나 칼럼을 '잡문'으로 부르며 꺼리는 것도 일면 당연하다. 대학에 자리를 잡기 위해선 영어강의 능력이 매우 중요해진 상황이다 보니 각양각색의 대중들에 맞춰 강연을 하려는 노력은 사치에 가깝다. 어쩌다가 '대중인문학자'로 유명해져도 이야기거리가 다 떨어지고 나면 생계가 막막해질 수도 있다. 몇 년씩 자료만 봐야 하는 연구를 출판시장이 지원해주는 경우도 없다. 독립 음악가들은 있어도 독립 연구자는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현실에서 역사연구는 자폐적인 의례가 되어가고 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들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동료 전문가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 익명의 심사자 세 명에게 평과 점수를 구한다. 심사자들이 타당성을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면 학계의 승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사료와 사료해석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과정으로서 지난 2세기 가량 권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 권위가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다. 역사학계의 승인 과정과 방식은 일반 대중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시스템 내부에 속한 전문가들마저도 심사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일방적이라고 불만을 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대중인문학자들은 자신들만의 독자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의외로 명확하다. 베스트셀러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해온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경우를 보자. 이 책의 저자 채사장은 대학인문학에 몸을 담고 있지 않은 ‘비전문가’다. 그는 주식매매를 하던 중에 인문사회과학 분야 지식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지식들을 수집하면서 자신만의 요약정리 노트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책까지 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지적대화는 철저하게 경제생활용 지식에 관한 것이다. 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전문가들 입장에서야 ‘저것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겠지만 월급을 받아서 자산관리를 하는 생활인들에게 이와 같은 지식은 얼마나 실존적인 것인가!


이런 판국에 전문가들은 대중들뿐만 아니라 동료 전문가들도 읽지 않는 연구업적들만 쌓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을 향해선 ‘저것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따름이다. 동료 전문가나 대중 어디에서도 자신들만의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진정성만을 주장하는 외톨이처럼 말이다. 국가 지원금에 기대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전문가들이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서 전문성을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점에 다시 묻는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가? 역사학계가 잠재적 독자들의 문제의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전문성은 어디에서도 보장 받지 못할 것이다. 판이 녹아내리고 있는 판국에 학문후속세대가 데뷔할 수 있을까? ‘전문가의 죽음’은 그렇게 우리 턱 밑으로 파고들고 있다.


(<만인만색 뉴스레터> 7,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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